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안 발디비에소 (문단 편집) ==== [[1936 베를린 올림픽|베를린 올림픽]]과 [[1939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페루|남아메리카 챔피언십]] ==== 발디비에소 커리어의 하이라이트. 베를린 올림픽에서 페루 대표팀은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핀란드]]를 7대3으로 꺾었고, 8강에서도 연장전 끝에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를 4대2로 꺾는 엄청난 성과를 연출하였다. 비록 오스트리아가 분더팀이라 불리던 당시 대표팀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하더라도, 페루 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한 것은 대단한 결과였다. 특히 연장전에서 무려 5골을 폭발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심판이 3골을 무효처리했음에도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경기가 선언되었고 페루는 당연히 반발하였다. 이로 인해 페루 선수단은 축구를 포함한 모든 올림픽 종목에서 기권하였고, [[콜롬비아]]도 이에 동참하였다.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 역시 페루의 처지에 동조하였고, 페루에서는 아예 난리가 났다.[* 오스트리아 측은 당시 페루 팬들이 구장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다고 페루 측을 공격했고, 더 나아가 페루 선수들과 권총을 가진 관중 때문에 제대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고 주장을 했다. 페루 측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예정된 대책회의에 참가하려 했지만 독일인들의 퍼레이드 때문에 그것을 못했다고 반박했다. 어찌되었든 페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와 [[FIFA]]는 페루와 오스트리아에게 재경기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예정된 재경기는 원래 이틀 후였지만 3일 뒤인 8월 11일로 예정되었다. 여기에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와 [[나치당]]이 개입되었다는 주장 역시 당연히 따라왔다.] >우리는 유럽 선수들이 신념이고 뭐고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래를 찾았다. >---- >마이켈 다소(당시 페루 올림픽 위원회 멤버) 3년 후 페루는 [[1939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페루|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하였고, 여기에서는 아예 우승이라는 대형 사고를 쳐서 올림픽에서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